영화<킬링디어> + 책<폭력과 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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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킬링디어

 

킬링디어

 

무고한 희생물에 투사된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

 

한 소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 남자의 호의를 받는다. 

남자는 아이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뭔가 자연스럽지 않아 보여서

그 모습이 마치 무언가 빚을 갚을 게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반대로 소년은 남자를 당당하게 대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제 막 심장 수술을 마치고 온 의사 스티븐( 콜린파렐 분)이고, 

소년은 마틴 (베리 케오간 분)으로 이 남자의 수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다. 

영화는 이게 의료사고인지 실수인지 분명하게 ’’ 말하진 않는다. 

단지 스티븐이 어떤 일말의 책임의식이나 도덕적 채무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 플롯은 무척이나 익숙한데, 그 플롯을 펼치고 이야기로 구현해 내는 방식은 독보적이며 천재적이었다. 

분명 현대를 무대로 하고 있고, 인물들도 이 시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이야기 자체가 신화적이며 그리스 비극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리스 비극의 특징이 무엇인가. 

대개가 인간의 운명, 신의 의도,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다가 끝내 어리석은 선택을 하거나

과오를 범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비극적 인간을 다룬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고 저지른 죄로 인해 무언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신탁을 통해 주인공이 자신의 죄를 알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비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대개 주인공은 서민이 아니라 왕이며 귀족이다.

관객들은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킬링 디어 역시 그리스 비극처럼 주인공은 성공한 심장 전문의다. 

게다가 그의 아내도 치과 의사이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무거워서 농담이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진지하게 진행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 영화가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원작으로 삼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본래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에 되도록 아무런 정보 없이 보는 편이다. 

요즘은 유튜브다 뭐다 해서 영화를 보기도 전에 정보를 얻어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의 경우에는 흥미가 반감되고 예측이 거의 다 맞아서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가는 걸 선호하고

그런 감상 태도를 지키려 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본 건 아마도 2018년 무렵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이후에도 셀 수 없을 만큼 관람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딱 하나였다. 

감독이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것. 

영화 송곳니로 처음 감독의 작품을 봤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뒤에 알프스’ ‘더 랍스터로 다시 한번 깊은 충격을 받았다. 

감독은 매 영화마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프레임을 열었고, 

이야기 표현도 상당히 개성적이라 단 한 씬도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없었다. 

위에서 킬링 디어가 어딘지 익숙하다고 한 것은 이야기 전체적인  & 매너’가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는 얘기였지

독창성이나 창의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여 이후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작 가여운 것들 옴니버스 영화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까지’  전부 다 챙겨본 건 물론이다.

 

영화 킬링디어의 간단한 내용은 이렇다. 

, 그전에 원작으로 삼았다는 ‘에피게네이아’를 살펴보자. 

이피게네이아는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의 장녀이다. 

트로이로 출전 준비를 마친 그리스 함대는 밀어줘야 할 바람이 멎자 출항하지 못한다. 

아가멤논은 예언가를 통해 아가멤논이 여신 아르테미스가 가장 아끼는 사슴을 사냥으로 죽인 것에

여신이 노기를 품었기 때문이란 말을 듣는다. 

아르테미스의 화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아가멤논의 질문에

딸 에피게네니아를 희생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아가멤논은 결국 결정을 한다. 

아가멤논은 딸을 죽이는 행위를 통해 사슴과 등가 보상으로 속죄를 하려한 것이고 

따라서 딸은 대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테미스 여신은 제물로 바쳐져 죽기 직전의 이피게네이아를 사슴으로 바꿔치기한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더 있지만 여기서는 킬링 디어’의’  제목에 맞게 희생물 에만 집중한다.

킬링 디어’의’  원제가 ‘The killing of Sacred Deer’인 것은 이 이야기가 희생제물에 관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티븐은 실수든, 무엇이든 사람을 죽였다. 

수술할 당시 음주 상태였다. 

마틴은 스티븐이 간단한 선물로 죄책감을 덜려고 하자 그럴 수 없는 일이라며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신 가족 중에 하나도 죽어야 한다고 한다. 

그게 형평성에 맞는 것이라 한다. 

스티븐의 아들이 갑작스럽게 병을 얻고

마틴은 스티븐에게 죽어야 할 가족을 선택하지 않으면 결국 가족 전부가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결국 딸 킴까지 다리를 못쓰게 된다. 

격분한 스티븐은 마틴을 감금하고 폭행한다. 

스티븐의 처 안나(니콜 키드먼 분)는) 마틴에게 어떻게든 아이를 낫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사태는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틴이 예언한 대로 아들 눈에서 피가 흐른다. 

마틴은 이 신호를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이라 말했다. 

스티븐은 결국 가족 중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아니면 다 죽어야 하니까.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쓰고, 총을 쏴서 가족 중에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해 죽인다. 

아들  이 총에 맞아 죽는다.

그 대가로 딸은 병이 낫고 가족은 평화를 되찾는다.

 

영화를 봤을 당시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마틴 역할을 한 배우 베리 케오간

물리적 협박과 폭력 없이 조근조근한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두려움을 맛보게 한다. 

마틴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스티븐의 목을 조여 간다.

기괴함도 도를 넘지 않아서 더 기괴하게 보인다. 

반면에 스티븐역의 콜린파렐은 상대적으로 덩치도 큰 어른이지만

마틴이 가해오는 두려움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인간상을 보여주는데, 

그리스 비극에서 비극적 운명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잘 표현해 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그리스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서사구조와 정서가 확실히 그리스 비극적이다. 

음악도 대공연장에서 그리스 비극을 직접 보는 듯한 비장미 흐르는 곡들을 선택했다. 

이 영화가 그리스 비극과 가장 비슷한 부분은 주인공은 결코 처음에 죽거나 희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이니까 그런 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비극에서 주인공은 비극을 일으키는 대상 이 아닌 느껴야 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 값으로 죽으면 안 된다.

그 죗값으로 인간이 치를 수 있는 가장 심한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것이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고통을 주는 희생물은 대체로 주인공이 가장 애착하거나 주인공과 동급에 있는 인간이나 대상이다.

 

폭력성과 성스러움

 

책=폭력과 성스러움

지은이=르네지라르

출판사=민음사

 

‘르네지라르’는 그의 명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희생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회는 보호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구성원을 해칠 수도 있는 폭력의 방향을 돌려서, 

비교적 그 사회와 무관한 즉 희생물에게 향하게 한다
지라르는 이 책에서 희생은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의 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집단 내부의 원초적 폭력을 희생할만한 대상 에게 돌림으로써

인간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인간 집단 특유의 제도”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영화 킬링 디어’로’  돌아가보자.

스티븐은 자기의 실수로 사람을 죽였고(그가 바로 수사슴) 

피해자 마틴은 등가의 책임’에’  따라 스티븐에게 자기 아버지가 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스티븐이 이를 거부하자 결국 가족 중 하나를 암사슴(sacred deer)으로 바쳐야 하는 상태에 이른다. 

아니면 공동체, 즉 가족이 전부 죽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보듯이 그리스 비극은 항상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공동체의 위기가 닥치고

그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무고한 누군가가 희생되는 이야기 구조가 많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가 신화에서만 있을까? 

신화 구조에서는 이것이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힘, 즉 운명적인 것을 막으려 희생양을 삼지만

현대 사회는 구성원의 불만을 돌리려고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 삼는다. 

 희생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공동체가 위기에 몰리면

기득권층은 그걸 무마시키기 위해 무고한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서 불만이나 폭력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선 가장 만만한 킬링 디어가 연예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혹자는 연예인이 무슨 약자냐고 하겠지만,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어느 쪽이 힘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본주의 논리로만 생각하면 본질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영화 ‘킬링디어’는 그리스 비극의 플롯을 차용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잔인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선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이며, 

그 희생자는 대개 힘없고 무고한 약자일 경우가 많다는 것을 영화는 다시 한번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평범한 듯 하지만 인상적인 엔딩. 

아들 을 희생시킨 스티븐의 가족이 을 먹으려 식당에 앉아 있다. 

아들 '밥'의 자리는 비어있고, 가족은 완전히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마틴을 만난다. 

마틴과 친했었던  도 마틴에게 알은척을 하지 않는다. 

스티븐 가족과 마틴은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어쩌면 가족이 다시 마틴에게 희생을 요구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스티븐과 그 가족은 이후 어떻게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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