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Poetry)>.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소위 ‘씨네필’ 들은 꼭 몇 번씩 보는 작품이 있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봐서 도대체 몇 회차를 본 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는 작품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작품이 워낙 많지만 그래도 그중에 꼽으라면
우리나라 감독의 경우 이창동 감독, 봉준호, 박찬욱의 영화가 그렇고,
외국감독으로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드니 빌뢰브, 크리스토퍼 놀란, 고레에다히로카즈, 루벤외스틀룬드 감독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특히 시나리오까지 외울 정도로 수 없이 본 영화가 있다.
이창동 감독의 <시 poetry> 가 그렇다.
특히 <시 poetry>는 영상은 물론이고 각본집도 촘촘하게 들여다봤으니
개인적으로 참으로 애정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체 뭐가 나를 그렇게 <시 poetry>에 매료되게 했는지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주인공 미자(윤정희 분) 역의 대사 한 마디 때문이었다.
손주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한 소녀를 죽게 하고,
그 부모들이 모여 위자료 문제나 아이들 처리 문제들을 마치 반상회 하듯 논의하는 자리에 있던 미자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안에서는 여전히 그 논의가 계속되지만 미자는 밖에서 꽃을 보고 있다.
미자를 데리러 온 기범 부(안내상 분)가 시를 쓰냐는 물음에
미자는 그냥 메모를 한다며 꽃에 대해 적은 걸 말한다.
“피같이 붉다고요””
이 대사는 미자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던 병실에서 동백꽃을 봤을 때,
“겨울의 꽃, 붉은 고통의 꽃” 이라며 “꽃 중에서 붉은 것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장면과 일맥상통한다.
피해소녀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어떻게 하든 이것을 조용히 처리하려는 기범 부를 포한한 가해자 아버지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영화 <시 poetry>는 제목처럼 주인공이 ‘시’를 완성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린 여기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poetry’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보통 ‘시 한 편’이라고’ 할 땐‘poem’을 쓰지 ‘poetry’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이 영화는 한 편의 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시’라는 장르 자체로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주인공 미자는 삶에서 고통을 느끼고 관조함으로써
‘아네스의 노래’라는’ 한 편의 시 즉, poem을 완성하게 된다.
따라서 그녀의 삶은 poetry에서 poem으로 구체화된다.
시작이 매우 파격적이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이 보이고 아이들이 주변에서 노는 소리가 생활 소음처럼 들리는데, 강에서 무언가가 떠내려온다.
한 아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고, 카메라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 점점 아래로 떠내려오는 그것을 비추면
교복차림의 여학생이 엎어진 채 떠내려온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위에 타이틀 <시 poetry>가 올라간다.
영화 <시 poetry>는 손주 종욱(이다윗 분)과 단둘이 살고 있는 미자가
어느 날 마을에서 한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이의 죽음에 ‘종욱’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종욱이의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라’ 할 정도로
손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미자는 반신불수인 강노인(김희라 분)을 돌보는 간병인 일을 하면서도
‘시’를 배우러 문화센터에 나간다.
무엇이든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세히 보라는 시인 선생의 말을 들은 미자는 집으로 돌아와 자세히 보는 연습을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자세히 보고 시인처럼 살고 싶은 그녀에게 종욱의 친구 기범 아버지가 (안내상 분) 연락을 해온다.
이 작품은 손주가 소녀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미자가 '시'를 공부하면서 겪는 이야기, 두 가지 플롯으로 진행된다.
손주가 소녀를 성폭행해 죽게 했다는 것을 안 미자는 종욱을 지켜보지만
어떤 반성이나 죄책감도 보이지 않자 마음이 복잡해진다.
종욱이 학교로 간 뒤 종욱이가 끄지 않고 나간 컴퓨터 소리가 나자 그걸 끄려고 애쓰는 미자의 모습은
제어할 수 없는 종욱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교감의 주선으로 위자료를 1인당 오백만원씩 내기로 정한 날,
미자는 돌아오는 길에 죽은 소녀‘ 희진’을 위해 미사가 열리는 교회에 들렀다가 ‘희진’의 사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강노인을 힘겹게 목욕을 시킨 후, 땀에 젖은 몸을 씻으려 샤워를 하던 미자는 참았던 울음을 토해낸다.
미자의 울음은 슬픔이 아닌 비통함이고, ‘희진’을 죽게 한 가해자의 보호자로서 무력함의 고백 같은 것이었다.
배우 윤정희 씨는 그 장면에서 고통스럽게 울음을 게워내는 연기를 통해 깊은 내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윤정희 배우의 유작인데 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당시 실제로 초기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미자는 밥을 먹고 있는 손주 앞에 희진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놓아 보이며 손주가 반성하길 바라지만
종욱은 마치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 패스처럼 무감하기 그지없다.
미자는 결국 강노인을 통해 위자료 오백만원을 구해 기범 부에게 전하곤 손주를 경찰에 넘긴다.
영화는 미자가 문화센터 마지막 시간에 꽃과 함께 제출된 미자의 시 ‘아네스의 노래’ (아네스는 희진의 세례명이다)가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며 그 아이가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을 비춘다.
시처럼 살고자 했던 미자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하며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맨드라미처럼 피 같았고, 동백꽃처럼 붉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영화 <시 poetry> 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무감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자는 ‘종욱’이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무고한 한 여자아이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해 죽게 해 놓고도
한 조각 반성도 없는 모습을 보고 아파한다.
미자의 고통은 죽은 희진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느껴야 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종욱’을 보는 고통이기도 하다. 하여, 미자의 시 쓰기는 ‘쓰는 행위’나 ‘내용’이나 둘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가?
수전 손택은 책 <타인의 고통>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 진부한 유행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의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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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타인의 고통
지은이=수전 손택
출판사=이후
수전 손택이 말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수차례 경험했다.
단식 투쟁을 폭식 투쟁으로 비웃고,
자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부모를 향해 “지겨워 죽겠다” 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또 다른 고통을 느꼈다.
단식 투쟁을 반대하고, 심지어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는 자식 잃은 부모의 외침도 듣기 싫을 순 있다.
그러나, 그 반대를 표현하는 양식이 폭력과 인격 모독이라면
‘그런 표현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반대’라는’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린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으며,
그런 방법은 넘치고 넘쳐 굳이 창의적일 필요도 없다는 걸 왜 외면하는가?
상대 의견이나 행동에 반대하기 위해선 꼭 고통을 주는 방법이어야 하는가?
우린 종종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한 사건에서 대중이나 제삼자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경우를 본다.
이들은 피해자에 대한 연민보다는 가해자가 가진 삐뚤어진 강함을 내면화시킨다.
손택은 같은 책에서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야 한다” 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타인의 고통에 연민조차 보내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
손택의 말대로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 자체가 자신의 무력함이나 무고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고통이 될 것이므로 극복보다는 차라리 타자화하는 쪽이 훨씬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 아닐까?
고통받는 대상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타자화해야 한다.
그 방법으론 정치적 반대집단으로 몰기, 메카시즘, 진영논리 등이 될 것이다.
이런 타자화 프레임에 한번 갇히면 상대가 어떤 고통을 받아도 연민은커녕 동정 조차 하지 않게 된다.
영화 ‘시’에서 기범 부를 포함한 가해자 아버지들이 보이는 죽은 희진에 대한 해결 방식도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아이가 그런 폭행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연민 없이, “이쁘고 키 크지도 않은데..” 라며 성적 대상화를 하고,
‘3천만원 정도로 합의를 본다’는 등 ‘해결할 문제’ 혹은 ‘내 아이의 장래에 영향을 줄 문제’ 등으로만 인식한다.
이런 가해자들 부모를 보며 미자는 그들과 같이하기를 거부하고,
밖으로 나가 맨드라미를 보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시’는 또래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던 한 소녀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그 해결을 위해 개입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미자는 어떡하든 손주 종욱이를 대신해 희진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을 것이다.
희진이를 위한 미사가 열리는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성폭행당했다는 과학실에서,
그리고 희진이가 투신했을 다리 위에서 미자는 희진이처럼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고통이 미자 인생에 마지막 ‘시’가 되었고,
그녀 역시 희진이가 되어 같은 방식으로 삶을 끝냈을 것이라는 암시 하며 끝을 맺는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밀양>을 찍을 당시 밀양 성폭행 사건을 접했다고 한다.
그런 사건이 발생한 밀양을 무대로 영화를 하기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나 감독은 그 사건을 외려 더 중심으로 가져와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감독의 태도는 영화 속 미자와 많이 닮아 있다.
영화에서 기범 부는 미자에게 희진이 엄마를 만나 이렇게 저렇게 설득해 보라고 한다.
마지못해 희진 모에게 찾아간 미자는 알츠하이머 병으로 인한 건망증인 듯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 돌아온다.
그러나 그게 건망증 탓이 아니라
미자가 희진 모에게 차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냥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뒤에 나온다.
위자료 오백만원을 구하지 못했다고 기범 부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희진 엄마를 마주하게 된 장면이 그것인데
미자는 희진 모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도망 나온다.
알츠하이머 병은 단기 기억 상실이 주된 증상이므로 잠깐 만난 희진 엄마를 기억하기 쉽지 않다는 걸 떠올려보면
그날 희진 엄마를 만나고도 그냥 온 것은 회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자의 그런 태도는 영화를 찍던 중에 성폭행 사건을 접하곤 <밀양>이란 영화를 접으려 했던 감독과 비슷했다.
그러나 감독도 <밀양>을 접는 대신 미자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한 것처럼 영화 <시 poetry>를 탄생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