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김탁환
-교양에 눌린 소설적 내러티브의 아쉬움.
<방각본 살인 사건>은 역사추리소설이다.
대개의 추리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도입부에 임팩트가 강한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게다가 격동의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정치상황 및 시대상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이의 교양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이는 작가 김탁환이 소설 후기에서 밝혔듯이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한
그 시대상의 치밀한 연구가 가져다준 노력의 산물인데
마치 현 정치상황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묘한 유사성이 있어 읽는 재미를 한층 배가 시켜준다.
이런 면에서 <방각본 살인 사건>은 매우 매력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방각본 살인사건>은 그 시대적 배경과 추리 기법을 차용했다는 면에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두 소설은 모두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정치상황 및 시대 상황에 논픽션과 픽션을 적절하게 가미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마치 소설이 아닌 실제 역사 사건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독자는 가공된 인물이 아닌 실제 인물들의 옆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혹은 따라다니며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는 역사적 지식과 교양을 총 동원해 상상의 나래를 편다.
더욱이 소설 속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가공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을 보게 되며 재해석하게 된다.
이는 역사소설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방각본 살인 사건>은 정조시대, 백탑파라는, 한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백탑파는 영, 정조 시대 탑골 백탑 아래 모여 시문을 공부하고 경세를 논한
대표적 지식인 그룹으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김홍도, 백동수 등이 핵심이 된 북학파를 지칭한다.
이들은 연경 여행을 통한 선진적 문명의식을 지니고 북학을 나라를 구할 중심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대부분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당상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정조의 정치 개혁과 문화 혁신을 충실히 보필하였다.
이야기는 가공인물인 의금부 도사 이 명 방이
또 하나의 가공인물 김진을 주인공으로 서술한 일인칭 형식을 띄우고 있다.
의금부 도사 이 명 방은 도성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범으로 매설가 청운몽을 잡아 능지처참을 시키나
어찌 된 일인지 청운몽이 죽고 나서도 살인사건은 계속 터지고
결국 이 명방은 자신이 죄 없는 청운몽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이 명방은 백탑파 백동수와 가공인물인 김진의 도움을 받아 진범을 밝혀내지만
그 배후에 거대한 정치세력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방각본 살인사건은 기법적으로 추리형식을 취한다 했으나
정작으로 소설의 핵심 내용은 정조임금을 둘러싼 반대세력과
정조임금을 옹호하려는 일종의 386세대인 백탑파 그룹 간의 정치적 알력을 그린단 면에서
단순 추리소설과는 다른 교양적 측면이 강화되어 있다.
독자는 읽는 내내 작가 김탁환이 펼치는 그 시대의 지식인들의 모습과
그들을 통해 보이는 북학의 개념,
그리고 정조시대의 정치상황등 다양한 정보들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양적 측면이 소설적 기능을 약화시키는데 이 소설의 문제점이 있다 하겠다.
작가는 이야기가 한참 진행될 때도 자신이 얻어낸 그 시대상의 상황이나 배경 등을 설명하느라
정작 이야기가 가야 할 방향을 놓치기 일쑤였고
소설의 내레이터인 이명방 스스로도 멋쩍게 “한가하게“ 이런 것을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할 만큼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곤 한다.
게다가 교양적 측면의 강화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라 할지라도
지나치게 넘쳐나는 한자어들은 읽은 이에게 적잖은 부담을 준다.
마치 작가는 한자어들을 갈고닦아야 할 의무를 가진 것처럼 한자어들을 남발하고 있다.
이는 우리말로 표현되어야 할 우리 소설이 나갈 방향과도 사뭇 다른 것 같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우리말의 보고라 한다.
그만큼 벽초가 우리말을 갈고닦아 기름 쳐, 하나의 조합으로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들로 우리의 이야기를 묘사하는데 노력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임정>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민초며
<방각본 살인사건>의 등장인물들은 백탑파라는 지식인 그룹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들의 톤에 맞게 문장을 조합하고 만들어간다 할지라도, 김탁환은 지나쳤다는 얘기다.
또한 방대한 자료를 통한 치밀한 연구의 산물인 교양적 측면 또한 지나친 면이 많이 눈에 띈다.
이는 <이문열의 소설>을 대할 때 느끼는 “작가 자신의 참을 수 없는 박학다식함을 통한 지식적 유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문열이 소설이 그러한 교양적 측면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읽히는 것은
소설적 내러티브 구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있다는 것인데,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은 매력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내러티브 구조 자체에 충실하지 못한 진행을 함으로써 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극적 텐션을 자꾸만 떨어뜨린단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대조를 이루는데,
<영원한 제국>은 추리소설 본래의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 하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
그렇다고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어떤 교양적 측면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제국>은 교양과 이야기가 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방각본 살인사건>은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는 고리, 인물의 움직임의 개연성 부족 등에서 전체적인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김 진이라는 인물은 마치 슈퍼맨처럼 그려져 있어 독자를 끌고 가지 못하고 언제나 독자보다 앞서 있다.
또한 일인칭 서술자인 의금부 도사 이명방 또한 지나치게 무능하게 묘사되어 단순한 내레이터에 불과한 느낌이다.
게다가 서술자 이 명방과 청운몽의 여동생 청미령과 사이에 흐르는 멜로드라마적 구조는
본 사건과 전혀 어울리지 못해 불협화음을 내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방각본 살인사건>은 역사와 교양은 넘쳐나지만
사람과 사건의 리얼리티는 지나치게 떨어지는 소설적 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이러한 약점은 추리소설로서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명백한 한계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