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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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박노자

출판사=한겨레

 

당신들의 대한민국

-지극히 객관적인 잣대로 본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내가 박노자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아마도 2002년 초입이었던 같다..

러시아 이름이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인 그는 한국의 매력에 푹 빠져 한국사람이 된 이른바 귀화인이었다.

당시 그는 방송이며 신문이며 각종 매스컴을 통해 한국사회의 병폐를 꼬집고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곤 했는데 

티브이나 여타의 매체를 통해 외국인의 눈을 통해 본 한국의 모습 운운하는 것을 많이 봐왔던 나로서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인들의 입에서 박노자라는 이름을 자주 듣게 되고

또 누군가의 집에서 그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처음 보고 몇 페이지 넘겼던 기억이 있다.

정독이  아닌 그저 둘러보기 정도로 본 그때의 느낌은

이방인 출신이 우리 사회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의 글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 또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 다시 그 책을 접한 나는 한 마디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우선 그때 이런 책을 그냥 지나친 나의 경솔함에 놀랐고,

그 내용들이 나의 폐부를 찔러대는데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감옥에 있는 모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라는 서문으로 시작한 이 책에서는 그는 한국사회에 뿌리깊이 내려온 전반적인 폭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행하는 폭력부터 조직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개인이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 등

우리 사회에 깔린 다양한 폭력과 또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까지 폭넓고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우리가 같은 동아시아인에게 가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와 세계적 종속의 거대 담론을 거부하고자 했던 우리들이 식구들일심단결을 우선시하는

가족주의적 종속의 미시담론을 절대화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 폭력의 삼위일체타도를 외치던 1960년대의 구미 학생운동과는 달리 

국가와 폭력의 문제를 간과한 채

남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제국주의)만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꼬집고 있다.

따라서 국가 폭력을 거부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행동인 양심적 병역 거부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군대를 하나의 통과의례로 인식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가에다가 남의 나라 군대가 수도 한복판에 버티고 있고

또 그 나라 무기를 수백억 달러어치나 강제로 사줘야 하는 이 분명하고도 엄연한 현실 앞에서

국가 방위를 무시하는 양심적 병역의 거부야 말로

우리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양심불량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지적대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위해서라면  살인마저

문제가 되지 않는 이 절대적 폭력 상태가 과연 정당한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다.

세상 누구도 같은 인간을 죽일 권리는 없다.

국가 역시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제국주의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힘의 논리로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폭력성 때문이 아니냐.

대체 무슨 권리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짓밟고 약탈하고 죽인단 말인가.

그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자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한 훌륭한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하나, 역지사지로 어느 나라의 선량한 한 국민이 소박한 꿈을 가지고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제국의 잔인한 군인의 군홧발과 총칼 앞에 무참히 쓰러져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실제로  이런 일은 늘 일어난다)

그 쓰러진 인간 앞에서 자국의 훈장을 달고 당당하게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는 군인의 모습이 과연 아름다운가?

다른 나라 국민은 다른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죽여도 되는 건가?..

 

그럼 침략이든 방어든 전쟁이 나가서 무조건 싸우지 말라는 얘긴가?

그게 아니다.

요는 사람을 죽이고도 그것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야만적 문화 자체가 문제라는 거다.

불가피한 전쟁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살육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월남전을 상기해 보라.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나 혹은, 5.18 광주항쟁 때 파견되었던 공수부대요원들 중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그 살육의 기억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얼마나 많은가.

국가가 살인을 지시해 놓고 그로 인해 생긴 그들의 상처에 대해 한번이라도 살펴본 적이 있는가?

가해자라는?.. 이유로 또 국가에 의한 또 다른 피해자인 그들에게 국가에서 해준 게 무언가

진정, 국가를 위한 “살인”에는 양심마저 면죄부를 준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언제 저질러질지 모르는 폭력과 살육을 위해

살인 연습을 해야 하는 군대에 대한 양심적 거부권을 줘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나 역시 어느 정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내가 지금 어느 정도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을 직접 모색해 본 일이 없기에 여지를 두는 것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개가 다 인정하고 있는 분단현실,

또, 그에 따르는 병역의 의무에 대한 당연한 존중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한 사유-공기관으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부적절함을 판명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병역의 의무를 거부할 권리가 없으며 거부 즉시 실정법 위반으로 법의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박노자의 주장에 귀 기울여 들으면서 난 순간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전부 허구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된 나머지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어보지 못했던, 그래서 상식이라고 여겨졌던 어떤 사안이 알고 보니 모두 허위로 밝혀진다면?

마치 영화 <메트릭스>처럼 실상은 기계에 모든 생체 에너지를 빨리고 있으면서

의식 세계는 그것과 정반대로 행복하다고 믿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면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동안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힘, 공권력이나, 군사력,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물리력이 국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행사될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아니, 믿었다는 정도론 부족하다.

차라리 숭배했다고 봐야 할 것인데 이는 종종 애국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대대손손 가문의 영광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사람이.. 사람을 살육하는 행위가 살인일진대, 단지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면 살육이 아니라 애국이다?

결과적으로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국익이면 모든 게 면죄부를 받는다?..

세상에..

이런 미신이 어디 있나.

군국주의, 파시스트들은 우리를 그동안 상식의 미명 아래 우리를 철저히 세뇌시켜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상식화된 폭력은 우리를 우민화시켜 국가란 이름으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이란 이름으로

지속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폭력일수록 철저한 이데올로기나 관습으로 무장하고 있어

전혀 죄책감 없이 행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폭력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대학 내 서열화다.

 

마치 봉건 영주와 농노를 연상케 하는 교수와 조교관계,

그렇기 때문에 조교는 교수의 논문을 대신 작성해 주는 일이 허다하고, 당연시되며, 심지어는 당연시되며,

자신의 연구실적마저 교수에게 헌납(?) 해야 하는 철저한 불합리함 속에서도 전혀 항거하지 못하는

반인륜적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변태적 폭력 문화는

교수나 조교 양자가 오랫동안 당연히 인정해 온 불문율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 반기를 드는 행위 자체가 아니러니 하게도 “비상적인 “ 행위로 인식되는 것이며

조직의 지탄을 받는 돌출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간의 철저한 계산,

즉 가해자의 상식화된 권리와 피해자의 상식화된 묵인이 결합할 때 전통이란 이름으로 전수되는 것이다.

우린 자릿세라는 명목으로 시장 상인들에게 돈을 뺏는 양아치들 이야기를 허다하게 들어왔다.

대학 내의 폭력 문화가 양아치들과 시장상인과의 관계와 무엇이 다른가.

양아치들은 역시 상식화된 권리로 시장상인들의 금전을 요구하고

시장상인 역시 상식화된 묵인으로 그들에게 금품을 상납한다.

양아치들은 금품을 받는 대신 다른 상인들이나 또 다른 양아치의 적대행위를 막아주며 그들을 보호해 준다.

대학교수 역시 조교들의 노동력을 포함한 기타의 무엇을 제공받는 대가로

자신의 영향력으로 조교의 앞날을 좌우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천박한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며 패거리 속에 전통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린 예전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을 기억한다.

지도교수가 자신의 여제자이자 조교를 성희롱 한 사건으로

법원은 교수의 성희롱을 인정, 삼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러한 판결은 직장내서 암암리에 행해지던 상사의 의한 성희롱에 경종을 울렸으며

한번 만지면 삼천만 원 배상이라는 웃지 못할 유행어까지 양산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단순히 자연인 남자가 여자에게 행한 성희롱이 아닌,

봉건 노예제의 주종관계로 인식되어 온 교수와 조교 사이에서 일어난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파생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폭력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적자생존(適者生存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사회진화론적(Darwinian) 이데올로기가 만연해 있는데 대한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더욱 놀란 것은 이 같은 성희롱이 이미 또 여전히 대학 내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조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교수의 요구를 거부할 수 조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거부한 대가에 대한 책임은 자기 자신밖에 아무도 져주지 않는다는 패거리 문화가 만든

또 하나의 폭력성에 저항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배경 속에 상식화된 권리상식화된 묵인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 사건은 ““상식 확 된 묵인상식화된 권리에 반기를 든 일종의 계급적 저항인 것이었다.

또한 그 외에도 우리 안의 상식화된 폭력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폭력,

그리고 대한민국 국적 취득자격조건처럼 실질적으로 가난하고 나라 출신이나 배우지 못한 외국인은

철저하게 배제되게 만든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들 수 있다.

결국 우리는 폭력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진 동시에

우리 내부에서 행해지는 폭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일제강점 36년과 군사독재 18년의 쇠뇌에 의한 후유증 같아 착잡해지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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